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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기념식, 4.19혁명 알아보기

by hainya1004 2021.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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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4월 19일 4.19혁명 기념식이 민주묘지에서 진행한다는 소식입니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19일 오전 10시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 1960년 민중의 비폭력 저항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 싹을 틔운 시민혁명인 4.19혁명 제61주년 기념식을 개최합니다.
기념식 행사로 '새 아침, 민주주의를 노래하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기념식은 정부 주요 인사, 419혁명 유공자 및 유족 등 99명이 참석한 가운데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한 방역 대책을 철저히 수립하여 "헌화·분향, 국민의례, 경과보고, 기념사, 기념공연, '4·19의 노래' 제창" 등의 순으로 40분간 진행됩니다.

올해로 61주년을 맞는 419혁명 기념식은 대구 228 민주운동, 대전 38 민주의거, 마산 315 의거를 거쳐 419 혁명으로 이룩된 대한민국 민주주의 완성을 기념하고, 고귀한 희생으로 이룩한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맘껏 누리며 새로운 희망과 도전으로 419 정신을 계승시켜 나가자는 의미를 전할 예정입니다.
기념공연에 앞서 4·19혁명의 기폭제가 된 고려대 4·18 의거를 주도한 고(故) 박찬세 전 통일 연수원장의 후손과 대학생 2명이 61년 전 그날의 정신을 되새기는 '2021년 청년의 다짐'을 낭독합니다.
먼저, 헌화, 분향은 4.19 혁명 관련 단체장과 4.19 혁명 참여 학교(고려대, 서울대, 동국대, 대광고) 후배 학생들이 함께 4.19 혁명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경과보고에서는 우리가 일상처럼 누리고 있는 자유가 61년 전 불의에 항거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던 수많은 열사들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배우 최불암의 목소리를 통해 영상으로 담아낸다고 합니다.
기념사에 이어 ‘2021 청년의 다짐’은 고(故) 박찬세 님의 후손과 청년 대학생 2명이 오늘의 청년과 학생들이 만들어가야 할 민주주의를 다짐하며 61년 전 그날의 정신을 오늘에 되새긴다고 합니다.
기념공연은 가수 포레스텔라가 챔피언(Champions)을 부르며 4 19 혁명으로 완성된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나아갈 것을 노래를 할 예정입니다.
1960년 4.18 의거 당시 '고대신문' 편집장으로 4·18 선언문을 쓴 박 전 원장은 지난달 6일 별세해 국립 4·19 민주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끝으로 행사 참석자들이 모두 함께 '4.19의 노래’를 제창하며 기념식을 마무리한다.
보훈처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새겨진 4.19 혁명의 위대한 가치를 되짚고, 민주주의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부활했던 4·19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겠다"라고 밝혔습니다.


4.19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4.19 혁명의 원인은?

1960년까지 부정선거가 극으로 치달았습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의 죽음으로 더 큰 실망에 빠졌습니다. 조병옥은 이승만의 라이벌이었습니다.
선거전에서 야당 선거원들은 계속해서 체포되고 탄압을 받았습니다.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이 선거 당일 투표장에 나타나 있었습니다. 경찰도 공무원도 공개적으로 자유당 후보를 지원하였습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 3분의 2의 표를 얻었고 부통령 이기붕은 840만 표로 당선되었습니다.
국회에서 민주당이 진행한 선거는 불법적인 것이고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전국에 걸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었습니다.
4월 초 전국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여론이 증가하던 중 마산 해변가에 버려진 최루탄을 눈에 맞아 만신창이가 된 16세 마산상고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후 반정부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며 시민들과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시위 도움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부정선거 투표 방해 방법들

- 4할 사전투표, 3인조/5인조 공개투표, 완장 부대, 야당 참관인 참관 방해, 돌아가신 분 선거인명부에 올림, 올빼미 표, 샌드위치 개표 등

 

419 혁명 전개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그 가운데 수천 명이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은 데모대에 대하여 발포하기 시작했으므로 학생들의 시위는 폭동으로 화하였다. 전국적으로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과 같은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가세하였다. 서울에서만도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우리나라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반포되었다.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중장 송요찬(宋堯讚)이 서울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월 19일 이후 데모와 폭동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제 학생이 아닌 일반시민들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군대는 유혈사태를 경계하고 재산의 파괴를 방지하는 데 신경을 쓰면서 방관하는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승만은 반정부 시위에 관하여 더 이상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4월 21일 내각이 전국의 혁명적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결국, 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 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Macanarghy, D.P.)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반경찰·반 관료적 대중에 굴복하였음을 의미한다.

아픔을 이기고 더 좋은 대한민국이 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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