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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476주년

by hainya1004 2021.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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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476주년

안녕하세요, 
오는 28일은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충무공 탄신일이다. 요즘 많은 공직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충의와 청렴의 정신을 되새기고 이를 본받아 청렴문화가 전 공직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되기를 기원하면서 글을 작성합니다.
난중일기 중 ‘장부로서 세상에 태어나 나라에 쓰이면 죽기로써 최선을 다할 것이며 쓰이지 않으면 들에서 농사짓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구절은 그의 강직함이 잘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충무공 탄신 제476주년 기념다례가 4월 28일 오전 11시 충남 현충사에서 행사가 진행됩니다. 현충사에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남해안 연전연승을 뒤에 도운 연주현씨 일가가 이순신 장군과 교신한 서간첩(국보) 등이 보관돼 있습니다.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16세기 한국 해군의 대첩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인근 부대의 수많은 장군들은 국가와 가족의 안위를 모두 걱정하던 병사들, 희생을 무릅쓰고 승리를 도왔던 수많은 지역 리더, 백성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어떤 백성은 산 꼭대기에서 신호를 보내고, 어떤 리더는 군사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했습니다. 이들의 지원 속에서 충무공의 업적은 영국 넬슨 제독보다 우월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순신 장군 영정 논란?

-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봉안된 이순신 장군 영정은 1953년 장우성 화백이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서술했던 이순신 용모 묘사에 기반해 그렸고 1973년 정부표준영정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장우성 화백의 친일행각으로 영정 지정 해제가 논의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정 지정이 해제되면 공식적인 사용이 어려워지고 100원 주화의 등장인물 도안도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해제가 어려웠던 만큼 새로운 영정 제작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한마디로 익숙했던 이순신 장군의 얼굴과는 이별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 국정감사에서는 의원들이 '담당 관청(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이 표준영정 지정 해제를 요청했는데 왜 교체되지 않고 있냐'라고 질의했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문화재청장이 관련 위원회(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지정 해제를 검토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이순신은?
-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의 한 표상이다. 그런 추앙은 그를 수식하는 ‘성웅’이라는 칭호에 집약되어 있다. ‘성스럽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나타내지만, 천부적 재능과 순탄한 운명에 힘입어 그런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치열한 고뇌와 노력으로 돌파했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런 측면은 ‘악성’으로 불리는 베토벤이나 ‘시선’ 이백(李白)과 대비되어 ‘시성’으로 지칭되는 두보(杜甫)의 삶과 작품을 생각하면 수긍될 것이다.
이순신은 조선 인종 1년(1545) 3월 8일(음력 기준) 서울 건천동(乾川洞, 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이순신은 태어난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이순신은 자신의 일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뛰어난 인물을 만났다. 그는 나중에 영의정이 되는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었다. 서로 세 살 차이인 두 사람은 그 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국난에서 조선을 구원하는데 각각 문무에서 결정적인 공로를 세웠다. 조선 태종의 가장 큰 치적은 세종을 후계자로 선정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듯이, 유성룡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순신을 적극 천거하고 옹호한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의정의 혜안은 나라를 멸망에서 건졌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0세의 나이로 상주(尙州) 방 씨(方氏)와 혼인했다. 이순신은 방 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 1567년 출생), 이울(李蔚, 1571년 출생), 이면(李葂, 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이순신은 5년 뒤인 1572년(선조 5) 8월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 응시했다.
첫 임지와 직책은 급제한 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董仇非堡, 지금 함경도 삼수)의 권관(權管, 종 9품)이었다. 동구비보는 험준한 변경이었고 3년간 근무했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鉢浦, 지금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水軍萬戶, 종4품)로 임명된 것이다. 이 인사는 그 파격성도 주목되지만, 좀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처음으로 수군에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급속히 승진했던 이순신은 1581년(선조 14) 5월 두 해 전의 관직인 훈련원 봉사로 다시 강등되었다.
1583년(선조 16) 10월 건원보(乾原堡, 지금 함경북도 경원군) 권관으로 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발생한 여진족의 침입에서 그는 우두머리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한 달만인 11월 훈련원 참군(參軍, 정 7품)으로 귀경하게 되었다.
아버지 이정의 사망으로 3년상을 치렀고, 1585년(선조 18) 1월 사복시 주부(主簿, 종6품)로 복직했다. 40세의 나이였다.
1589년(선조 22) 2월 전라도 순찰사 이광(李洸)의 군관으로 복직되었다가 10월 선전관(宣傳官)으로 옮겼고 12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1590년(선조 23) 7월에는 유성룡의 추천으로 평안도 강계도호부 관내의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종3품)에 임명되었다.

 

임진왜란

조선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포로 출항하면서 발발했다. 7년 동안 이어진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와 민생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전쟁이 시작된 뒤 보름 여만에 서울이 함락되고(5월 2일) 선조는 급히 몽진해 압록강변의 의주(義州)에 도착했다(6월 22일). 개전 두 달만에 조선은 멸망 직전의 위기에 몰린 것이었다.
널리 알려졌듯이 왜란에서 이순신은 임진년 5월 7일 옥포(玉浦)해전부터 계유년(1598) 11월 18일 노량(露梁) 해전까지 20여 회의 전투를 치러 모두 승리했다. 그 승전들은 그야말로 패색이 짙은 전황을 뒤바꾼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는 왜란이 일어난 1년 뒤인 1593년 8월 삼도수군통제사로 승진해 해군을 통솔하면서 공격과 방어, 집중과 분산의 작전을 치밀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나라는 전란에 휩싸였고 그는 국운을 책임진 해군의 수장으로서 엄청난 책임과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지만, 험난했던 그동안의 관직 생활에서 보면 최고의 지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기간이기도 했다.
백의종군 - 난중일기 '초1일 신유(辛酉). 맑다. 옥문을 나왔다. 남문(숭례문-인용자. 이하 같음) 밖 윤간(尹侃)의 종의 집에 이르러 조카 봉(菶)․분(芬), 아들 울(蔚-이순신의 차남), 윤사행(尹士行)․원경(遠卿)과 같은 방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尹自新)이 와서 위로하고, 비변랑 이순지(李純智)가 와서 만났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고, 윤기헌(尹耆獻)도 왔다. 이순신(李純信)이 술을 가지고 와서 함께 취하며 위로해 주었다. 영의정(유성룡), 판부사 정탁(鄭琢), 판서 심희수(沈喜壽), 이상(貳相, 찬성) 김명원(金命元), 참판 이정형(李廷馨), 대사헌 노직(盧稷), 동지(同知) 최원(崔遠), 동지 곽영(郭嶸)도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이순신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백의종군을 시작한 직후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4월 13일). 그는 나흘 동안(4월 16~19일) 말미를 얻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다시 종군했다.
정유재란 - 그동안 소강상태였던 전쟁은 정유년(1597)에 재개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원균(元均)이 칠천량(漆川梁)에서 대패하면서 수군은 궤멸되었다. 내륙에서도 일본군은 남원(8월 16일)과 전주(8월 25일)를 함락한 뒤 다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다.
전황이 급속히 악화되자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8월 3일). 임명 교서에서 국왕은 “지난번에 그대의 지위를 바꿔 오늘 같은 패전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때 그에게 남아 있던 전력은 함선 13척이었다.
그 함대를 이끌고 한 달 뒤 그는 명량(鳴梁) 해전에 나아갔고(9월 16일), 스스로 ‘천행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다. 그때 그의 마음과 자세는 전투 하루 전에 쓴 “필사즉생, 필생즉사”라는 글씨에 담겨있다.

거북선은?
조진수록전사장“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龜船)과 판옥선은 임진왜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다.

- 갑판 위에 덮개를 씌운 특수한 구조의 군함
- 조총 탄환에 대한 든든한 방호력
- 최선봉 돌격선 역할을 수행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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